cover제목 놀이와 인간
저자 로제 카이와
발행일 1958.

놀이란 무엇인가?

요한 하위징어는 인간 사회의 근원을 놀이에서 찾은 바 있다. 쟁취와 운이라는 두 요소를 통해 사회를 분석한 『호모 루덴스』는 고전이 되었다.

로제 카이와는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더욱 자세하게 인간의 근원을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 본성을 크게 4가지로 나누고, 이들의 결합에 따라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분석하였다.

그럼 놀이의 본능 4가지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아곤 Agôn

무엇이 소유를 증명할까? 무엇이 권리를 증명할까? 혹자는 거저 주어진다고 말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쟁취하는 것이다. 힘으로, 노력으로, 두뇌로 상대방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알레아 Alea

아니다, 틀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도 있다. 신분, 유산, 외모를 어떻게 쟁취한다는 말인가? 거저 주어지는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족하다. 알레아는 라틴어로 주사위라는 의미다. 행운을 상징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으리라.

아곤과 알레아는 요한 하위징어가 제시한 상반된 놀이의 본능이다. 카이와 또한 이 요소를 인정했으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나머지 두 본능을 포함시켰다.

미미크리 Mimicry

인간은 가끔 일탈을 꿈꾼다. 연극을 보거나, 검투사들의 싸움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가면무도회에 참석하여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욕망이 있다. 어떤 역할을 모방하는 것 또한 인간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놀이가 된다.

일링크스 Ilinx

왜 사람들은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터에 타는 것일까? 굳이 커다란 놀이기구가 아니더라도, 그네나 시소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현기증을 일으키는 이런 기구에 굳이 몸을 맡기는 것 또한 놀이 추구의 본능이다.

한편 카이와는 놀이의 본능 4가지와 함께 놀이의 체계화 수준에 따라 파이디아루두스라는 극단의 개념을 제시한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카이와는 본능을 짝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중 유효한 짝은 다음 2가지다.

  • 아곤=알레아
  • 미미크리=일링크스

카이와는 인류 역사를 이 두 개의 짝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둘 중 먼저 시작된 쪽은 미미크리=일링크스 조합이다.

고대 사회

부족 사회는 샤먼의 의식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고, 부족의 일원을 가려내고, 미래를 예견했다. 주술사는 평소에는 그저 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다가, 의식을 치를 때가 되면 가면을 쓰고 연기를 피운다. 그 순간, 주술사는 더 이상 부족 사람이 아니다. 신을 모방하는 자의 곁에는 혼돈의 도가니가 펼쳐진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춤사위 속에서 의식이 이루어진다. 고대 부족사회는 미미크리와 일링크스로 이루어진다.

근현대 사회

인류 역사는 부족 사회를 넘어 더욱 큰 단위로 발전해왔다. 곡식의 생산량이 늘어난다. 누군가는 더 가지고 누군가는 덜 가진다. 누가 그것을 정하는가? 근대 초기 사회에서 재화의 분배는 을 통해 이루어졌다. 더 가지면 더 가진대로, 덜 가지면 덜 가진대로 살아가면 그만. 하지만 공정을 바라는 사람들의 욕구는 시험과 선별 같은 제도를 만들어냈다. 경쟁과 쟁취를 통해 재화를 분배하는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근현대사회는 아곤과 알레아로 이루어진다.

물론 두 짝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주된 놀이의 영역이 이동할 뿐, 네 요소는 항상 존재한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의외로 졸업논문 때문인데, 심리학과 게임을 엮은 주제로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던 중 본서의 인용구를 보게 되었다. 놀이의 특징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주제로 한 책일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사회학 책이었다. 논문을 쓸 당시는 좀 실망한 감이 있지만 게임 개발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주기는 했다.

놀이의 4가지 요소에 대한 철학을 게임 로비 화면에 녹여보면 어떨까, 하는. 좀 엉뚱하긴 하지만 한 번 쯤은 만들어보고 싶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카이와의 회랑 Salon de Caillois이라는 아공간이 게임 로비가 된다. (벌써부터 이게 뭔 소린가 싶다.) ATLAS의 여신전생이나 페르소나시리즈의 벨벳 룸을 생각하면 쉽다. 이 회랑에는 4명의 조력자가 있어, 주인공의 게임 진행을 돕는다. 이 넷은 각각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 일링크스가 되는 것이라는 설정. 아곤은 칼을 든 기사의 모습으로, 높은 점수를 얻거나 목표를 달성할 경우 새로운 도전과제를 주거나 쟁취의 보상을 준다. 알레아는 주사위 장식이 달린 머리끈을 묶은 점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확률형 아이템과 연관지으면 어떨까, 하지만 이러면 신에 대한 감사라는 본질보다는 오히려 속물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미미크리는 가면을 들고 있는 여배우다. 캐릭터 스킨 변경이나 아이템 장착, 스토리 선택 등은 모두 이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링크스는 술 달린 부채를 들고 있는 광대다. 게임을 시작하고 끝낼 때마다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결국 게임에 몰입하는 것은 약간의 현기증을 동반하니까.

쿠키런같은 모바일 게임을 해보면서 느낀 점은, 로비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게 수익 증대를 위한 장치라면 할 말은 없지만, 4개의 요소를 로비에서 분리하여 플레이어의 편의를 고려하면 어떨까 싶다.



가지 뻗기

운이냐, 능력이냐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다면 마이클 센델의 『공정이라는 착각』을 읽어보아도 좋다.

본서를 읽을 예정이거나 읽었다면,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를 읽어본다.

주어지는 것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한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