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제목 공정하다는 착각
저자 마이클 샌델
발행일 2020.12.01.

무엇이 현대사회를 규정할까?

돈? 민주주의? 과학기술?

잣대는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소위 선진국이라는 세상을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능력”.

글 꽤나 배웠다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 거금을 손쉽게 벌어들이는 동안 세상의 언저리에서는 단순 노동자, 비숙련공들이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며 주린 배를 쥐어잡은 채 근무지로 향하고 있다. 이게 무슨 3류 정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현실이다. 물론 한국의 지니계수는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출근길의 풍경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출근길을 나서는 그들은 어쩌면 평생, 얼굴 한 번 마주치지 못한 채 늙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들을 격리시켰을까? 샌델은 그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해묵은 생각을 있는 힘껏 받아쳤다. 귀한 직업은 유능하고 부지런해서, 천한 직업은 무능하고 게을러서 얻게 되었다는 그 생각. 그 생각의 관성은 너무 큰 것이어서 방향을 바꾸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만으로도 책에는 의미가 있다.

물론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등 그의 책을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샌델 특유의 열린 결말은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학교 입학 시스템에 추첨제를 넣어보자는 시도, 모든 직업에 대한 감사라는 도덕 윤리의 부활 등은 분명 이론적으로는 바람직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입시

샌델은 미국에서 권력자의 입시비리가 대중의 질타를 받는다 했는데, 한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차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의사 비슷한 딸과 그 덕에 법무부장관이 될 ‘뻔’했던 그… 분의 이야기는 누구라도 알 것이다. 왜 우리는 미친듯이 학벌에 집착할까?

소위 전도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능력의 증명으로 학위를 얻는 것이 본질이라면, 오늘날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학위를 얻기만 한다면 이것이 곧 능력이 된다. 선후관계를 뒤바꿔버릴 정도로 능력의 증명이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이 능력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바로 우리의 도덕 기준이다. 권위에 대한 마땅한 존중, 능력을 갖추기까지의 노력은 유능한 자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시험을 잘 치는 것만으로도 마땅히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

사회과학에의 적용을 위한 통계학에는 차별 기능 문항(Differential Item Functioning)이라는 개념이 있다. 엄청 어려운 단어가 나왔다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베이비핑크와 코랄핑크를 구분해보라고 하면 남자가 잘 맞힐까, 여자가 잘 맞힐까? 남자가 메이크업아티스트라거나 여자가 색약이라거나 하는 등의 예외를 포함한다고 해도, 확률상 여자가 더 잘 맞히지 않겠는가? 축구선수 이름을 맞혀보라고 하면 결과는 아마 반대일 것이다. 이런 게 성별에 대한 차별 기능 문항이 된다.

성별에 대해서뿐 아니라 경제적 수준에 따라서도 차별기능문항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승마, 펜싱 같은 스포츠는 물론 하프(이 악기는 무척이나 비싸다고 한다)같은 악기에 대한 숙련도는 어느 쪽이 높을지 굳이 생각할 것도 없다. 미국에서는 특례입학제도로 스포츠나 예술 특기생을 상당한 비율로 뽑는데, 이게 차별기능문항들로 구성된다는 것은 그냥 대놓고 있는 집 자식 뽑겠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문제는, 누구에게나 같은 난이도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되는 수능조차 차별적인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의사·변호사의 자식이 공장 노동자의 자식보다 수능 점수가 대체로 더 높다. 수시보다 정시에서 빈부격차에 따른 합불 경향이 두드러진다니, 이건 심각한 문제다. 한편으로, 개인적으로는 수시도 공정한 제도로써의 본질을 한참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이 해결책이란 말인가.

샌델의 추첨제는 일견 타당하다. 다들 비슷한 경쟁자들이라면, 그냥 바닥에 뿌려놓고 아무 이력서나 주워서 합격시키면 된다. 그럼 탈락자들이 억울하지 않겠냐고? 그런데, 샌델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입시에 을 개입시키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학벌의 붕괴까지 기도하는 상당히 큰 그림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지향하는 바와도 같다. 중상위권 국립대 씩이나 나와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웃기지만, 학벌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싶은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밖에는 이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본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좋은 학교를 나와도 기회가 없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대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도전할 수 있는 사회가 지향점이다. 그리고 이 입시라는 개미지옥의 해결책은, 어른들의 세계와 긴밀히 연관된다.



직업

직업에 귀천이 있을까? 사람들은 모든 직업은 평등하다는 입바른 얘기를 너무 쉽게 한다. 판사와 목수의 망치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사회에서 가치는 대체 무엇을 대변할까? 자기 아들 버스기사한테 90도 인사를 시키는 부모가 나중에 아들이 ㅈ소기업에 들어가길 원할까, 공기업에 들어가길 원할까.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귀천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실소가 나온다.

미국에서는 소위 화이트칼라블루칼라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해있다고들 한다. 트럼프의 당선 원인을 분석해 보면, 이 블루칼라의 분노를 잘 이용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자신들이 무능하고 게을러서 블루칼라가 되었다고 스스로 여기게 된, 이 도덕적 타락은 도저히 위로받을 방법이 없다. 차라리 계급 사회였다면 계단을 오르지 못할 핑계라도 있는데, 이 세상은 핑계거리조차 던져주지 않는다. 힐러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저능아들이라고 소리쳤다. 트럼프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일을 주겠다고 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에게 표를 던졌겠는가? 물론 재선은 실패했지만 그가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트럼프의 전략에서 볼 수 있듯 블루칼라의 사회적 소외감이 상당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샌델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걱정한다.

한국은 어떨까? (여기서부터는 필자의 사견이니 너무 진지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 애초에 한국은 샌델이 제기했던 이런 문제들을 고려할 조건부터가 갖춰져 있지 않다. 미국은 고용 유연성이 상당한 국가다. 잘 다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 통지를 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반면 한국은 이중 삼중으로 피고용 자물쇠를 잠가놓는 탓에 한 달 전부터 통지를 하고 서면 대면 온갖 접촉을 하고 퇴직금을 갖춰주고 사후보장을 해주고 하느라 진이 다 빠진다. 한국은 경제 구조 상 기술집약적 상품을 수출하는 기업들이 이끌어가는 나라고, 이런 기업들은 하루라도 빨리 우수한 인재를 갖다 쓰고 싶은데 이 철옹성같은 빌어먹을 고용안정성이 R&D를 막고 사업 확장을 막고 신규고용도 막는다. 그 와중에 탄생하는 것이 21세기 헬조선 최적화 계급제, 정규직이다. 그렇다. 정규직은 이 시대의 양반이고 비정규직은 상놈이다.

그래도 이 계급제는 사다리를 하나 남겨놓는데, 그게 입시다. 이 한 가닥 사다리를 어떻게든 비집고 올라가보겠다고 전국 고3들은 미친듯이 기출문제를 풀어댄다. 하지만 정규직 자리는 한정되어있다. 일반적인 사기업에서 정규직이 되기는 글렀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눈을 돌린다. 공무원이다. 40%에 육박하는 청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다른 건 몰라도,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야 양반 노릇은 할 것 아닌가. 슬픈 세상이다.

조선의 계급제가 무너진 것은, 모두가 양반이 되어서가 아니다. 막상 양반이 많아지니 그들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다. 결국 모두 양반이 아니게 되고서야 계급제는 붕괴했다. 한국의 공무원 러시를 해결할 가장 본질적인 해결책이 여기에 있다. 정규직이 사라지면 된다. 나도 취준생인 입장에서 불편한 이야기지만, 학벌이 정규직을 보장하고, 그 학벌을 대학이 보장하고, 그 대학을 10년에 육박하는 입시과정이 보장하는 한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정규직이 사라지면 더이상 학벌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면 굳이 입시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 입시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면 안정적인 삶을 위해 다른 방식으로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일단 이 단계까지는 와서, 샌델이 제기한 문제를 고려하는 것도 늦지 않을 것이다.

(* 어쩌면 정규직 붕괴의 반발로 초기에는 공무원에 더 많은 인원이 몰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입장은 다르다. 왓슨이 의사 몇 백 명을 대체할 수 있는지,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 공무원을 몽땅 해고하면 된다. 각 처장 자리만 남겨놓고-처장은 인공지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 밑에 인공지능을 앉혀두는 것이 그야말로 최소국가다. 밀턴 프리드먼이 제안한 기본소득 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능력주의 vs 능력지상주의

정말로 능력주의는 나쁜 것일까? 샌델도 실력 있는 자가 자격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마냥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자격에 도덕적 권능을 부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뿐. 자본주의는 참 문제가 많은 개념이다. 빈부격차를 수반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결국 냉전의 승자는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참 문제가 많은 제도다.(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보다는 민주정이라는 말을 쓰는 걸 선호한다) 대중의 어리석은 선택이 모두를 불구덩이 속에 빠트릴 수도 있지만, 결국 인류 역사의 승자는 독재정이 아니었다. 능력주의도 그렇게 본다면 문제가 많은 개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결국 세습제를 꺾고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능력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의 성취욕구를 자극하고, 사회 발전을 유도한다는 장점을 가졌기에 승자가 된 것이다. 능력주의를 대체할 완전한 개념이 나타난다면 모를까, 이걸 굳이 뒤집어 엎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케인즈와 하이에크의 자본주의가 그러했듯, 능력주의도 내재된 모순을 해결해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진정 타파해야 하는 것은 능력지상주의다. 성취를 능력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도덕성을 능력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샌델이 감사함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한다. 성공한 자에게는 자신의 운을 감사할 여지를, 실패한 자에게는 자신의 불운으로부터 위로받을 여지를 주는 것. 자본주의와 배금주의가 다르듯, 진정 타파되어야 할 것은 사회에 만연한, 능력을 가장한 오만이다.


가지 뻗기

본 서를 읽었거나 읽을 예정이라면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도 함께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